제주 도보 여행 후기 (2017.11.27. - 2018.11.29.)
11월 말의 제주는 늦가을의 정취에 푹 빠지기 아주 좋은 곳이다.
서울에서 벚나무 단풍은 가을을 알리는 첫 신호 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 이곳의 벚나무 단풍은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 준다.
여행 첫날은 햇살도 좋고 바람도 잔잔했지만 아쉽게도 미세 먼지가 심해 한라산을 볼 수 없었다. 해질녁 동검은이 오름을 돌아 나오다 곶자왈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개구멍을 통해 겨우 동검은이 오름을 빠져 나왔을 때의 그 미묘한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한 시간 전만해도 길을 잃고 헤매며 두려움에 판단력이 잠깐 흐려지기도 했지만 내 앞에 한 상 차려진 맛있고 싱싱한 참돔과 방어회를 먹으며 친구와 딸 아이, 그리고 딸아이 친구와 함께 웃으며 삶을 얘기하고 있으니 이런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둘쨋 날, 한라산 등반에서는 안개와 비 때문에 한라산 풍경은 머릿속으로 그리며 윗세오름을 지나 목적지인 영실 휴게소를 가기 위해 등산로만 보고 열심히 걸었다.
눈 내리는 한라산을 기대하며 아이젠도 챙겨 갔던 우리는 뜻밖에도 비와 짙은 안개를 만났지만 산행 준비를 잘 해 간 덕에 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며 안전하게 걸었다. 비가 세게 내리며 기온이 떨어져 장갑 없이 스틱을 잡고 가기에는 조금 손이 시리긴 했지만 끝까지 탈 없이 잘 걸었다.
한라산 영실 매표소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으려고 보니 비가 들이쳐 의자 위가 물바다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니 옆에 있던 한 청년이 가지고 있던 각티슈에서 휴지를 한 웅큼 빼내어 내게 건네 준다.
의자의 물기를 닦아내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내게 휴지를 준 청년의 친구는 반팔을 입고 있어 추운지 팔짝팔짝 뛰며 운동을 하고 있다. (이 청년들은 중국인인데 영어도 한국어도 못 해 의사 소통이 전혀 안 된다.)
이 청년이 추워 보여 주머니에 있던 핫팩을 꺼내 주었더니 이 청년은 깜짝 놀라며 손을 흔들며 아니라고 거절을 한다. 대신 이 청년은 제주시로 나가는 버스가 올 때까지 계속 운동을 했다.
오후 4시 반 경 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숙소로 들어 가면 저녁을 먹으러 나오기가 싫어 오후 어제 저녁 갔던 '금복촌'에서 뜨끈한 탕을 먹으며 하루 종일 비와 바람에 시달린 몸을 덥히려고 했지만 식당 문은 오후 5시에나 연단다.
할 수 없이 또 다른 우리의 단골집인 '양반촌'으로 가서 할머니가 해 주시는 오징어 볶음을 맛있게 먹은 후 숙소로 가는 길에 군고구마를 샀다. 이 군고구마가 다음날 우리의 점심이 될 줄이야.
셋째 날은 날씨가 흐렸고 우리가 가는 지역마다 날씨 변동이 심했다. 알람을 잘못 맞춘 덕에 제주올레 3코스 대신 선택한 미술관 여행도 아주 좋았다.
제주터미널에서 급행버스 대신 일반버스를 타고 맨 앞자리에 앉아 가며 제주 할머니들과 기사님이 하시는 대화를 엿듣는 것도 버스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마침 한림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한림 인근 지역의 버스 정류장마다 할머니들이 많이 탔다. 그런데 한림 오일장에서 내리는 분은 달랑 두 명이고 모두 우리와 같이 한림 환승센터에서 내리신다.
버스를 갈아 타고 금릉 으뜸해변에 내리니 못 보던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무슨 운동이냐고 물으니 카이트란다.
20분 정도 머무른 금릉 으뜸해변에는 제주답게 바람이 심하게 불어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즐기기에는 너무 추웠다. 하지만 카이트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바람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아 보였다.
바람 부는 금릉해변을 뒤로 하고 다시 버스를 환승해서 저지리 현대미술관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제주현대미술관 분관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들어가서 보기로.
박광진 작가의 작품을 충분히 즐긴 후 현대 미술관으로 가니 오늘이 마침 11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라 관람료가 50% 할인이란다. 살면서 이런 혜택도 누리다니...
현대미술관에서는 제주비엔날레 전시를 관람한 후 미술관 뒷길을 따라 가 김창렬 도립미술관도 들렸다 다시 현대 미술관으로 돌아 오는데 배가 고프다.
미술관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물어 보니 주변에는 마땅한 식당이 없고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단다. 제주 도립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내린 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10분 후에 버스가 온단다.
너무 배가 고파 어제 산 군고구마를 꺼내 버스 정류장에 서서 먹고 있으니 멀리 버스가 오는 게 보인다. 커피를 마실 시간도 없어 우선 버스를 타고 커피를 마신 후 오설록 정류장에서 제주시 가는 급행버스를 갈아 타기 위해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버스 기사가 버스에서는 음식물을 먹으면 안 된다고 친절하게 말씀해 주신다.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이 잘못된 일이었다니 죄송할 뿐이다.
4개월만에 간 제주는 버스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어 모든 게 낯설다.
제주 전역의 파란색 일반 버스비는 1,200원이고 환승은 40분 안에 4번 가능하다. 빨간 급행 버스는 기본이 2,000원이고 구간에 따라 요금이 올라 간다. 급행 버스를 타고 일반 버스를 타도 환승이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었지만 한 두 번 타 보니 아주 편리한 게 전보다 버스 운영제도가 더 체계적이다. 버스 운행시간도 짧아지고 버스 연결도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백약이 오름 같이 대중교통으로 접근 가능한 곳에 버스 정류장이 없다는 것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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