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4일(금)
도보 구간: Le Pin - La Côte St. Andre, 23.4 Km (실제 걸은 거리: 30 Km)
걸린 시간: 7시간
아침에 일어나니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7시가 되니 천둥이 심하게 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시에 건너편 주인집으로 가서 소박한 아침을 먹고 감사 인사와 함께 숙박비를 내며 순례자 수첩에 까미노 도장을 받았다. 밥을 먹는데 아델하이드가 오늘밤 여기서 머무를 거라고 주인집 아주머니인 엘리자베드가 알려 준다.
숙소로 건너와 아델하이드에게 짤막한 메모를 남기고 9시에 가랑비를 맞으며 오늘의 목적지인 La Côte St. Andre(라꼬드 셍 앙드헤)를 향해 다비드와 함께 집을 떠났다. 우리의 숙소가 까미노 길에서 멀지 않아 쉽게 길로 들어섰는데 시작부터 산길이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다비드가 자기의 속도대로 빠르게 길을 걸었고 나는 내 속도로 여유있게 걸었다.
시간이 갈수록 비는 점점 세게 내려 걸어가는 것이 조금 피곤하다. 길을 나선 지 한 시간쯤 지나 Blaune 마을 쉼터에서 만난 독일 순례자 펠릭스(Felix)는 말이 없는 청년이다. 그래서 서로 눈 인사만 했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렸다. 비가 잠시 그쳐 점심을 먹으려고 비를 피할 수 있는 남의 집 처마 밑에 자리를 펴고 편안하게 앉아 쉬고 있는데 빗줄기가 다시 세진다. 걱정이 되어 쉬는 것을 멈추고 배낭을 정리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오후 1시가 되니 비가 그치고 해가 난다. La Frette(라프레뜨) 마을에 도착해 교회에 들어 가려고 까미노 길을 잠시 벗어나 교회로 올라가니 오전에 만났던 펠릭스가 교회 앞 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아쉽게도 교회 문이 잠겨 있다. 되돌아 내려가 까미노 길로 가지 않고 지도를 보며 까미노 길을 찾아 가려고 하니 말이 없던 펠릭스가 가는 방향을 알려 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La Ceresière(라쎄레씨에르) 교회 앞 쉼터에서 발에 생긴 물집에 Compeed 밴드를 붙이며 쉬고 있는데 어제 발롱꼬뉴 교회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순례자 2명이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길을 걷다 보니 이들과 함께 라꼬뜨 셍 앙드헤(La Côte St. Andre)에 도착했다. 이들은 오늘 9.4 Km를 더 걸어 Faramans(파라망)까지 간다고 해서 베를리오즈 박물관 앞에서 헤어졌다. 이들 중 한 순례자는 너무 피곤해서 걸음걸이가 건강해 보이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된다.
원래는 베를리오즈 박물관을 보고 숙소로 갈 생각이었지만 피곤해서 그냥 지나쳤다. 숙소를 찾아 가는 길에 약국에 들려 물집 치료에 필요한 Compeed 밴드를 2개 더 사고, 지도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서 숙소를 찾아 갔다. 그런데 표시를 한 숙소 주소에는 집이 없고 큰 길에 차단기만 있다. 다행히 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길래 주소를 보여 주며 물어보니 잘 찾아 왔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집이 나온단다. 5분쯤 걸어 올라가니 무슨 기관인 듯 사람들이 건물 앞에 모여 있다. 이곳이 숙소일 거란 생각이 안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주차장 근처로 까미노 표시가 있다. 그런데 표시를 따라 갔는데 뭔가 이상하다. 다시 돌아와 건물 앞에 모여 있는 한 여자에게 물어 보니 잘 찾아 왔다며 나를 안내 사무실로 데리고 간다. 곧 이어 사무실 여자가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까미노 숙소의 호스피탈레노인 기젤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나서는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숙소 찾아가는 방법을 불어로 설명해 준다. 대충 알아 듣고 가는데 뭔가 이상하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되돌아 보니 자기가 있는 건물로 와야 하는데 내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건물의 입구를 통해 돌아서 이층으로 들어 오라고 까미노 숙소의 호스피탈레노가 손짓을 한다. 그러면서 마침 지나가는 두 명의 프랑스 청년들에게 나를 좀 도와주라고 한다. 이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건물로 들어가 무사히 2층 숙소로 올라 갔다. 조금 전 나를 부른 호스피탈레노는 70세의 기젤(Gisell)이다.
오후 4시경,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스틱을 세우고 거실로 가서 배낭을 내려 놓으니 기젤은 오느라 수고했다며 시원한 사과 주스를 한 잔 건넨다. 간단한 안내를 받은 후 기젤이 자기가 머무는 건너편 1층 방을 주어 배낭을 내려 놓았다. 마침 나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한 다비드가 내려와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2층에 있는 다비드 방을 가보니 알프스가 보이는 전망이다. 그래서 나도 전망 좋은 다비드 옆 방으로 방을 옮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날씨가 안 좋아 맘껏 전망을 즐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제네바에서 도보를 시작한지 8일만에 혼자 쓰는 방에서 짐을 푸니 너무 편하고 좋다. 조금 쉬고 있으니 다비드가 와서 자기는 시내에 있는 ‘카지노’ 슈퍼에 가서 저녁거리를 사러 가는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다 주겠단다. 그래서 방울 토마토를 부탁했다.
저녁 6시 반에 기젤과 둘이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다비드가 저녁거리를 사왔다. 채식주의자인 다비드는 스스로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한 사람 먹을 양이 아니다. 아보카도를 좋아하는 그는 이번에는 아스파라거스와 부드러운 치즈, 감자, 계란 그리고 내가 부탁한 토마토를 사왔다. 또 필요한 수건도 사왔다. 밥을 먹던 기젤은 수건은 여기도 많다며 하나 주겠으니 반품하라고 한다. 그러더니 나와 함께 밥을 먹다 일어나 수건을 가져다 주고는 다비드에게 얼마냐고 묻더니 영수증을 받은 후 수건값을 돌려 준다. 내일 기젤이 ‘카지노’ 슈퍼에 영수증과 수건을 가져가서 반품할 거란다. 정말 친절한 순례자 도우미다.
기젤과 밥을 먹으며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그는 건너편 부엌에서 조용히 요리를 하더니 단품 요리지만 멋진 식사를 준비해서 들고 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비드 요리를 먹을 건데 그랬다 싶다. 3일째 파스타를 해 줄까 봐 기젤의 저녁을 먹겠다고 한 게 잠시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기젤의 음식이 투박하기는 해도 정성이 듬뿍 담겨 있어 맛있게 먹었다.
다비드의 음식을 맛보니 역시 보이는 것처럼 맛있다. 다비드는 저녁을 만들면서 계란을 삶았다며 내일 점심에 먹으라고 내게 건네준다. 당연히 계란값은 1/n 이다. 감사하게도 생각지도 않은 먹을 거리가 또 생겼다.
다비드가 식사 자리에 함께해서 대화는 불어로 하고 다비드가 영어로 통역을 해 주었다. 기젤은 3번이나 집에서부터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걸었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이 안 좋아 순례자들을 도와주는 호스피탈레노로 일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단다. 관절이 안 좋고 천식이 있어 2층을 올라 다니는 것이 힘들다는 기젤은 건강 때문에 6월 22일까지만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 간단다.
내일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내일 아침은 7시 15분에 먹고 조금 일찍 떠나기로 했다. 기젤이 소개해 준 숙소에 전화까지 직접해서 예약을 도와주어 내일 숙소도 해결 되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