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일)
도보 구간: Primarette - Saint-Roman-de-Surieu , 17.6 Km (실제 걸은 거리: 21 Km)
걸린 시간: 4시간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활짝 개었다. 어제 오후 널어 놓은 빨래는 자기 전 방에 들여 놓는 것을 잊고 밤새 밖에 두었더니 공기가 습해서 아직 축축하다. 할 수 없이 빨래는 배낭에 매달고 걷기로 했다. 배낭을 챙겨 놓고 아침을 먹으러 내려 가니 이봉이 팬케잌을 만들고 있다. 매일 아침 빵과 쨈, 우유, 커피, 요구르트만 먹었는데 오늘은 좀 특별한 아침 식사다.
오늘 아침 식사 때도 어제 저녁처럼 이봉은 우리를 유쾌하게 해준다. 클라우디아와 내가 후식으로 나온 아펠무스(Apfelmus)에 관해 얘기하는 독일어 단어를 듣더니 무스는 불어로 설거지 세제라는 뜻이니 무스는 먹으면 안 된다고 농담을 한다. 어제 저녁에는 영어의 'used to' 용법을 설명하면서 우리를 유쾌하게 만들더니 오늘 아침에는 무스다.
9시에 락슈미와 이봉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클라우디아와 요나단과 함께 출발했다.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요나단의 공부를 도와준다는 클라우디아는 아들의 언어 습득에 도움을 주고자 시간만 나면 와서 3-4일씩 까미노 길을 걷고 돌아가 다음에 이어서 걸으러 온단다. 요나단은 지금 학교에서 불어를 배우고 있는데 엄마 속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불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한다. 더구나 그는 묻는 것 외에는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주로 엄마하고만 소곤소곤 얘기를 한다. 걱정하는 클라우디아에게 말이 터지면 요나단의 언어가 금방 향상될테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니 그녀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런데 요나단의 행동이 조금 이상해서 길을 걸으며 다비드에게 그의 행동이 낯설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다비드는 자기는 몸에 문신을 하고 있고 나는 한국 아줌마라 아마도 요나단이 조금 낯설고 두려워서 그런 것 같다고 답한다. 아무리 그래도 15살 남자 아이의 행동이 너무 소극적이다.
아침에 지트를 나오면서 클라우디아는 힌두교, 불교, 기독교, 가톨릭 등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이처럼 재미있는 하룻밤을 보냈다는데 대해 감동을 받았다며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얘기를 한다.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데 종교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는 데 나도 동의를 했다.
까미노 길로 들어서면서 나는 오늘 17.6 Km를 걸어서 한가하게 걷고 싶으니 오늘 나보다 더 멀리 가는 두 사람에게 먼저 가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천천히 걷던 두 사람은 역시 젊어서 걸음이 빨라 금방 언덕을 넘어간다. 둘을 먼저 보내고 느긋하게 걸으니 하늘도 더 예뻐 보이고 주변 풍경도 눈에 더 들어 온다.
언제나처럼 다비드는 오늘도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배낭을 꾸려서 내 뒤에 출발했다. 하지만 조금 있으니 금방 내 앞으로 걸어 간다. Le Bornet(르 보흐네) 이정표 근처 숲길에서 갑자기 음악소리가 들린다. 너무 낯설어 걸어 가며 옆을 보니 청년들이 무대에서 쓰는 큰 앰프를 몇 대 설치해 틀어놓고 아침부터 술을 마시며 놀고 있다. 그런데 내 앞에서 길을 가던 다비드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이 길이 아닌 것 같단다. 내가 급하게 Maps.me에 입력한 GPX를 보니 길에서 조금 벗어 났다. 그래서 급히 되돌아가 갈림길로 가서 이정표를 보니 두 길이 모두 까미노 길인네 우리가 갔던 길은 북쪽길이다. 숲길이 너무 시끄러워 이 길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나는 아무 생각없이 다비드 뒤만 따라갔는데 큰일날 뻔 했다. (그제서야 오늘 아침에 이봉이 셍 호망으로 가려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숙소에 도착해서 안 일이지만 이 길로 가면 우리가 갈 Saint-Roman-de-Surieu(셍 호망 드쉬휴)를 거치지 않고 Assieu(아쓔)로 간다. 이 북쪽 길은 정상적인 카미노길보다 5 Km 짧다.)
오늘은 발바닥에 물집이 많이 생겨 트레킹 샌달을 신고 걸었더니 걸을 만하다. 거리도 18Km 밖에 안 되니 오후 1시경 셍 호망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앞서 간 다비드는 벌써 숙소에 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숙소에 같이 가려고 마을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건너편 쉼터를 보니 펠릭스가 점심을 먹고 떠나려고 챙기고 있다. 펠릭스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한 후 다비드와 함께 숙소를 찾아 갔다. 우리의 숙소는 셍 호망 마을로 가지 않고 입구에서 10분 정도 산길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너무 일찍 숙소에 도착해 주인집 할머니 루씨엔(Lucienne)이 우리의 숙소를 정리하시는 동안 정원에 앉아 점심을 먹고 아침에 배낭에 매달고 온 젖은 빨래를 넓은 마당 한 켠에 있는 빨랫줄에 널었다. 그리고는 다비드와 함께 오늘과 내일의 숙소를 찾았다. 나중에 다비드가 할머니에게 부탁을 해서 할머니가 우리의 숙소를 예약해 주었다.
도보 일정을 짜면서 내가 천천히 걸어 혹시 다비드의 일정에 차질이 있을까 미안해서 바쁘면 너의 속도로 먼저 가도 괜찮다고 하니 자기는 시간이 있으니 나와 같이 계속 걷겠단다. 그래서 그가 세운 계획대로 내가 같이 걷고 만일 6월 22일(토)까지 르쀠 엉블레에 못 가면 중간에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하니 22일까지 르쀠에 갈 수 있다며 걱정하지 말란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일정 짜는 것을 무조건 다비드에게 맡기고 하루에 20Km든지 30Km든지 걸을 수 있으니 오늘의 목적지가 어디라고 얘기만 해 달라고 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는 비행기 일정 때문에 6월 22일까지 걷고 6월 23일에는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은 도보를 일찍 마쳐서 오후 시간이 여유롭다 그래서 정원에 앉아 어제 오후 정전으로 쓰지 못한 일지와 오늘의 여행 일지를 썼다. 멋진 전망을 지닌 시골집의 정취를 느끼며 한가하게 시간을 누리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여행 일지를 쓰고 있으니 루시엔이 시원한 사과 주스를 대접해 주더니 자기 집에 한국 순례자는 아주 귀한 일이라며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루씨엔에게 22일까지 르쀠에 가야 한다고 말하니 다비드처럼 갈 수 있다고 얘기해서 나의 도보 일정이 더 명확해졌다.
쉬는 중에 다비드는 오늘 너무 조금 걸어 운동이 필요하다며 온몸에 티벳트 불교 문신을 한 상반신을 드러내 놓고 근력 운동을 하느라 열심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청년이다. 아들아이와 같은 나이인 31살의 청년인 그는 쉬는 동안 남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같이 걷고 있는 내 얘기를 했더니 동생이 다비드에게 그곳에 대체 엄마가 생겼다고 말했다며 전한다. 다비드의 엄마 나이도 나와 같다.
프랑스에 있는 Accueil Jacquaire(아퀴엘 자꿰흐) 숙소 이름이 궁금해 다비드에게 물어 보니 Accueil는 환영이란 뜻이고, Jacquaire는 야고보의 길을 걷는 순례자란다. 결국 야고보의 길을 걷는 순례자를 환영하는 프랑스 민박집이다.
저녁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가니 루씨엔이 집안과 정원 중 어디서 저녁을 먹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노을 지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정원에서 먹겠다고 하니 장-피에르 할아버지가 정원 풀밭으로 식탁을 옮겨 주신다. 그런데 오늘 예약한 두 명의 독일 순례자가 아직 도착을 안 했다. 걱정을 하면서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호두 와인을 식사 주로 한잔씩 마시고는 준비하신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중에 두 명의 순례자(크리스와 이라)가 너무 피곤한 표정으로 들어 온다. 같이 식사를 하자고 권하니 샐러드를 먹은 후에는 자기들은 배가 너무 불러서 못 먹겠단다. 그러면서 중간에 소세지를 먹고 와서 배가 안 고프단다. 이들은 길에서 텐트를 치며 까미노길을 걷는 중인데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라가 도중에 발목을 삐고 지난 밤 비가 많이 와서 숙소에서 잤단다. 그런데 그 숙소 주인이 이 집을 예약해 주어 어떤 집인지도 모르고 찾아 왔단다. 이라가 발이 아파서 이들은 오늘 20 km의 거리를 거의 10시간 동안 걸어 왔다.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지 짐작이 간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도 안 먹겠단다. 사정은 알겠지만 조금 당황해 하는 루씨엔과 장-피에르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다비드가 아퀴헬 자꿰흐 숙소에 대해 설명을 해 주고는 다음부터는 밥을 먹고 오면 안 된다고 알려 주었다. 둘은 연인 사이인데 독일인 남자 친구인 크리스는 불어를 못해 여자 친구가 모든 것을 처리한다. 하지만 옆에서 보니 크리스가 지혜롭게 잘 조언을 해 주어 일 처리가 매끄럽다. 루씨엔은 밥을 먹다 일어나 힘들어 하는 크리스와 이라를 숙소로 안내해 주고 돌아왔다.
맛있게 저녁을 먹은 후 두 분이 식탁 정리 하시는 것을 도와 주었더니 고마워하신다. 73세인 루씨엔 할머니와 78세인 쟝-피에르 할아버지에게는 무거운 그릇을 돎기는 것이 힘든 일이다. 루씨엔은 마을과 떨어진 농가에 사는 것이 힘들어 마을로 내려 가고 싶지만 할아버지가 계속 농가에서 살기를 원하신단다. 오늘 오후에 둘러보니 농가의 규모가 제법큰데 관리를 거의 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멋이 풍기는 멋진 집이다.